[말씀읽기]
1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2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는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카락을 밀고 각각 수염을 깎았으며
3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4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들의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군사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그들의 혼이 속에서 떠는도다
5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피난민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까지 이르고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울부짖으니
6 니므림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었으며 연한 풀이 말라 청청한 것이 없음이로다
7 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8 이는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렸고 슬피 부르짖음이 에글라임에 이르며 부르짖음이 브엘엘림에 미치며
9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에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말씀묵상]
15장은 모압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이들의 교만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만들어간 것에 대한 심판이 선포됩니다. 여기에서 좀 특이한 점은 도시 이름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모압이 어떤 속성을 가진 나라인지를 보여 줍니다. 많은 도시를 건설했음을 보여 줍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들의 살 길을 찾은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1절에 나오는 알은 모압의 수도입니다. 기르는 거대한 바위 위에 요새화된 도시라고 합니다. 수도와 함께 강한 성읍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선포에 울며 애통하며 부르짖는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멸망하는 상황에서 당연한 모습이지만 5절을 보면 선지자의 마음까지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좀 다른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압이 이스라엘의 친족이라는 점입니다.
잘 알듯이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그곳에 살던 롯의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들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삼촌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언약적 자비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창19장에서 롯의 가족을 구원하는 과정을 보면 롯이 계속 지체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롯의 손과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셨는데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다고 합니다(창19:16). 게다가 도망하는 과정에서도 롯은 죽을까봐 지시한 성이 아닌 자기가 원하는 작은 성, 소알로 가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불신앙적인 모습입니다. 문제는 이후에 생깁니다. 소알에서 나와 산 속 굴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두 딸이 자손 번성을 위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녀를 낳은 것입니다. 큰 딸이 낳은 아들이 모압의 조상이 되고 작은 딸이 낳은 아들은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모압이었기에 태생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며 이들은 많은 도시를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모습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버리고 스스로 살아가려는 모습 말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이들에게 재물과 쌓았던 것들을 가지고 피난 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자신의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롯의 가정이 소돔을 빠져 나올 때도 아내가 뒤를 돌아보고 소금 기둥이 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이 그대로 후손들에게도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이 이사야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살아난 롯의 후예이며,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베풀어진 자들임을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장치를 모압 옆에 두시고 너희들을 인도하시고 살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보도록 하셨지만 모압은 자기 살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던 것입니다. 가인이 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롯과 모압만의 모습입니까? 구원받은 신자들의 삶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베풀어지고 있고 그에 대한 고백이 있음에도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의 가치들을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장치들을 신자들의 상황에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시고 주님만이 주인이심을 깨닫게 하시지만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압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셔서(9절) 철저하게 심판하시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도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도록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광야길을 가던 이스라엘을 모압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을 통하여 저주하려고 했던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발람을 통하여 특별한 예언을 하도록 하십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24:17). 이 정도의 예언을 들었으면 자세가 바뀌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끝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범죄하도록 한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며 결국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데까지 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빌3:18)가 아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영생을 사는 자로서 십자가를 의지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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